무협 세계와 판타지 세계를 오가는 소설 <묵향>은 실은 그리 대단한 걸작이라 할 수 없다. 묵향이라는 강력한 힘을 가진 어두운 주인공 캐릭터의 매력 하나로 소설 전체의 성패를 걸고 있으며, 그 이외의 스토리라인이나 배경, 등장인물 모두는 주인공을 부각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 어느 것 하나 탄탄한 구성이라곤 찾기 힘들다. 작가의 글솜씨도 그리 뛰어난 것이 못 된다. 다만 정성껏 꾸며진 세계관 설정으로 볼 때, 작가가 무협지와 판타지 소설의 지독한 매니아이며 그 가상의 세계를 무척 사랑한다는 것 하나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묵향>은 여느 무협지처럼 주인공 묵향의 성장소설이다. 그런데 한 가지 특기할만한 점은, 단순히 주인공의 무술 기술과 힘의 성장을 주된 성장분야로 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적인 성장(혹은 득도의 과정)을 부각시키고자 한다는 데에 이 소설의 매력이 있다. 묵향은 소설의 초반부에서 이미 세계에 그를 대적할만한 사람이 한명도 없을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현경의 고수가 된다. 이건 어찌보면 무협소설로서는 어이없는 설정이다. 자신보다 강한 자들을 대적하고, 가까스로 이기면 더 강한 자가 등장해야 재미있어지는 것이 무협소설 아닌가. 소설 내내 세상에 자신보다 강한 자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늘 자신보다 약자만 상대해야 하는 묵향은 자칫 재미도 없는 허무소설로 전락해버릴 수도 있었다.
작가는 이전의 진부한 무협이나 판타지에 질려있음이 틀림없다. 작가 스스로가 똑같이 진부한 무협 판타지소설들을 따분하고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의 작품 속 묵향이 자신보다 약한 시시한 세계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과 일치한다. 사실 이 느낌은 왠만큼 무협을 읽은 사람이면 공감할 수 있는 느낌이다. 1권에서 아직 장풍조차 못 날리는 허약한 주인공의 등장을 보면, ‘에휴, 몇 권이나 지나야 읽을만한 정도로 강해지니’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작가가 <묵향> 1권 첫머리에 기본 설정사항으로 ‘삼경’을 제시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인용해본다.
내공을 특출한 경지까지 연마한 고수들을 일컬어 사람들은 삼경(三境)의 고수라 부르고 있다.
제일경(第一境)은 조화경(造化境), 즉 화경(化境)이다. 이것은 천지인(天地人)의 삼화(三化)와 수목금화토(水木金火土)의 오기(五氣)를 고루 몸 안에 이루어낸 삼화취정 오기조원(三化聚頂 五氣造元)의 고수를 말한다. 온몸이 무예를 시전하기에 최적의 상태로 바뀌는 환골탈태(換骨奪胎)을 경험하며, 이러한 경지가 되면 능히 소리로 사람을 죽이고 손가락을 들어 작은 산을 무너뜨릴 수 있다.
제이경(第二境)은 신(神)으로의 입문이라 할수있는 현묘(玄妙)한 경지(境地) 즉, 현경(玄境)이라 한다. 현경의 경지가 되면 몸에 만독이 침범하지 못하는 만독불침(萬毒不侵)이 되며 겉으로 전혀 정기가 드러나지 않는 반박귀진(返縛歸眞)의 상태가 된다. 또한 나이가 연로한 사람이 이 경지를 이루면 머리가 다시 검어지고 치아가 새로나는 반로환동(反老換童)를 경험하며 몸에서 뿜어나오는 예기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
마지막 제삼경(第三境)은 불노불사(不老不死)의 진정한 신의 경지 즉, 생사경(生死境)이다. 인간의 생과 사를 초월하고 우주만물의 법칙을 한눈에 꿰뚫어내는 무예의 최고경지로 단 한명도 그 근처까지 접근조차 하지 못했기에 추측만 있을 뿐 마지막의 생사경은 완전한 미지의 세계다.
- 소설 ‘묵향’ 中에서
간단하게 정리해 1경인 ‘화경’은 천지만물의 존재를 깨달은 인간이다. 소설에서 ‘화경’에 이른 인간은 모든 무예기술에 통달한다.
2경인 ‘현경’에 이르는 핵심은, 1경에서 통달한 모든 무예기술을 잊어버리는 데에 있다. 더 정확한 표현은 ‘놓아버린다’가 맞겠다. 기술의 공식 따위에 더이상 얽매이지 않으며, 때문에 유치하게 ‘청월검!’ 따위의 기술 이름을 외치면서 공격하지도 않는다. 소설에서 ‘현경’에 이른 고수들이 대개 전투시 자세를 따로 취하지 않고 칼을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가벼운 자세를 취하는 것도 이때문이다. 실제로 이 무력해보이는 ‘현경’의 칼이 더 매서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경과 2경은 실제로 소설에서 등장하는 고수들이다. 이는 일반적인 무협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소설에서 최고의 고수라고 해봐야, 그 고수가 실제 행동하는 내용이나 기술 수준을 보면 묵향에서는 2경에 불과하다. 작가는 일부러 자신이 여태까지 무협소설에서 봐왔고, 스스로도 만들어봤던 ‘최고의 경지에 이른 고수’들을 2경의 틀에 가둬놨음이 분명하다. 그것을 넘은 경지가 작가가 묵향을 통해 그려보고자 하는 3경이다. 이 3경을 인용부분에서 작가가 ‘완전한 미지의 세계’라고 표현한 것은 아마 솔직한 작가의 심정일 것이다. 작가자신도 모르지만 기존의 고루한 무협소설을 뛰어넘는 경지를 찾고싶어서 묵향을 쓰기 시작한 것이고, 쓰면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생사를 초월하고, 우주만물에 대한 직관적 통찰력을 가진 경지. 소설 ‘묵향’을 빛나게 해주는 것은 아무도 이르지 못했고, 성장소설의 흐름상 주인공 묵향이 마지막에 이르러야만 하는 3경의 설정에 있다.
작가의 눈으로 보기에 대부분의 무협소설은 초짜에서 시작해 1경에 이르거나, 1경에서 더 나아가 2경에 이르는 것으로 끝난다. 동양식 판타지인 무협세계의 최고 경지가 겨우 현세에서 무예최강자가 될 뿐이라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고 저열한가. 이는 무협을 사랑하는 작가로서는 아쉽고, 또 욕심을 낼만한 문제이다. 무협세계라는 그릇도 더 큰 세상의 진실을 담을 수 있는 소설의 당당한 장르가 될 수 있다고 믿고서, 그 실험을 묵향을 통해서 한 것이다. 득도를 위한 작가의 파란만장한 실험대상이 된 주인공 묵향은 불쌍할 정도로 시달린다. 실험 과정에서 묵향이 쌓아온 속세의 모든 인간관계를 허무할 정도로 한순간에 파탄내버리기도 하고, 판타지 세계로 묵향을 보내 서양중세 모델의 흔한 판타지세계와 무림세계 중 어느 것이 더 인간적인가를 고민시키기도 한다.(주1)
아직까지 묵향은 그 끝을 보지 못했고, 아직 작가는 여러 실험 속에서 주인공 묵향과 함께 번뇌하고 있다(아직 완결을 못봤기에. 이번 6월쯤 나온다던데).
어렵고 벅찬 작업일 것이다. 실패할 가능성도 높다. 그도 그럴 것이 묵향을 제대로 된 ‘생사경’의 고수로 올리려면 작가 자신도 생사경에 이른 진짜 도인이 되어 그 경지를 이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묵향에서의 ‘삼경’은 일종의 비유로 여기면 된다. 1경은 인간이 사회화되고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 과정이며, 2경은 사회화를 통해 배웠던 룰을 재객관화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 종심소욕불유구에 이르는 경지이며, 3경은 생사마저 초탈한 도인이 되는 것이다.
얼핏 작가는 가볍고 즐겁게 1회성 소설을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의 어딘가에 진지한 구석을 갖고 있다.
묵향이 무림사(史)에 부족하더라도 중요한 성과를 남길 수 있길 기대하면서 패기넘치는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주1) 잠깐 게중 흥미로운 실험을 하나 소개하면, 남성으로서 자존심이 세던 묵향을 마법을 빌어 여성으로 만든 것이다. 처음에 묵향은 ‘연약한’ 여성이 되었다는 상실감에 자살직전의 음주폐인이 되지만, 곧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다시 가부좌를 틀고 수양을 시작한다. 뭐, 여성주의적으로 썩 의미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묵향이 여성의 몸이 되었다는 이유로 재사회화 과정을 겪으면서 소위 ‘여성성’을 획득해가는 대목이 흥미롭다. 재사회화를 통해 묵향의 감성도 조금 바뀌기 때문이다. 추후 자신이 예전에 체득한 ‘남성적 행동’을 여성의 몸으로 하니까, 주변 인물들은 몸만 바뀌었을 뿐 분명 똑같은 행동임에도 ‘야수적(?) 남성성’이 아닌 ‘야생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여성성’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부분도 한번 주목해봄직 하다. ‘귀여운 여성’이 하면, 그 어떤 행동을 하건(살인일지라도) ‘귀여운 여성의 행동’으로 취급받는 현실인 것이다.
댓글